무너진 제단의 파편 위에서, 교회의 자리를 묻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21 08:30
본문
알바니아의 불타는 바리케이드부터 우크라이나 크라마토르스크의 무너진 교회당까지, 오늘의 소식들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의 현실과 고뇌를 남김없이 비춘다. 사회는 이념과 분쟁으로 갈라지고, 교회는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유혹 앞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파편화된 세상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자리가 어디인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1504년 자메이카 해변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보여준 기만적인 행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초된 배에서 식량난에 허덕이던 그는, 곧 다가올 월식 현상을 미리 알고는 이를 ‘신의 분노’로 포장하여 원주민들을 협박했다. 어둠이 달을 삼키자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그에게 식량을 바쳤다. 이는 천체의 신비, 즉 신적 권위처럼 보이는 것을 이용하여 세속적 이익을 추구한 가장 교활한 형태의 우상숭배였다. 오늘날 교회 앞에 놓인 가장 큰 유혹 역시, 거룩함의 외피를 두르고 세상의 힘과 지혜를 탐하는 콜럼버스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콜럼버스의 배가 아니다. 교회는 폭력과 과잉 진압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알바니아의 거리에서, 어느 한 편에 서서 권력을 탐하는 대신 무릎 꿇고 기도하며 평화를 호소한다. 러시아의 포화로 건물이 파괴된 우크라이나의 교회는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영혼의 피난처이자 인도적 지원의 중심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또한, CIA의 트로이 목마라는 악의적인 음모론이 확산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속에서도, 교회는 세상의 비난에 변명으로 맞서는 대신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심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교회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시드니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길을 잃고, 성화를 도둑맞을 뻔하고, 심지어 봉송 주자가 사망하기까지 했던 해프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 앞에서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회는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에, 자녀의 작은 오디션을 앞두고서도 염려 대신 믿음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편지처럼, 세상의 거대한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신뢰를 선택할 수 있다.
변화의 시대 속에서 교회가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그것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동역하는 것(TWR 컨퍼런스)이며, 세상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 구조를 본뜬 조직이 아니라,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공동체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7-9). 세상의 무너진 제단 위에서, 교회의 자리는 바로 이 약함 속에서 강함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1504년 자메이카 해변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보여준 기만적인 행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초된 배에서 식량난에 허덕이던 그는, 곧 다가올 월식 현상을 미리 알고는 이를 ‘신의 분노’로 포장하여 원주민들을 협박했다. 어둠이 달을 삼키자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그에게 식량을 바쳤다. 이는 천체의 신비, 즉 신적 권위처럼 보이는 것을 이용하여 세속적 이익을 추구한 가장 교활한 형태의 우상숭배였다. 오늘날 교회 앞에 놓인 가장 큰 유혹 역시, 거룩함의 외피를 두르고 세상의 힘과 지혜를 탐하는 콜럼버스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콜럼버스의 배가 아니다. 교회는 폭력과 과잉 진압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알바니아의 거리에서, 어느 한 편에 서서 권력을 탐하는 대신 무릎 꿇고 기도하며 평화를 호소한다. 러시아의 포화로 건물이 파괴된 우크라이나의 교회는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영혼의 피난처이자 인도적 지원의 중심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또한, CIA의 트로이 목마라는 악의적인 음모론이 확산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속에서도, 교회는 세상의 비난에 변명으로 맞서는 대신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심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교회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시드니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길을 잃고, 성화를 도둑맞을 뻔하고, 심지어 봉송 주자가 사망하기까지 했던 해프닝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 앞에서 인간의 계획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교회는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기에, 자녀의 작은 오디션을 앞두고서도 염려 대신 믿음을 가르치는 어머니의 편지처럼, 세상의 거대한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신뢰를 선택할 수 있다.
변화의 시대 속에서 교회가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그것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동역하는 것(TWR 컨퍼런스)이며, 세상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 구조를 본뜬 조직이 아니라,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같이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공동체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7-9). 세상의 무너진 제단 위에서, 교회의 자리는 바로 이 약함 속에서 강함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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