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힘의 시대, 샬롬을 증거하는 교회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10-03 08:30
본문
평화의 상징이 군사 동맹에게 수여되고, 71년간 살아온 보금자리에서 87세 노인이 법의 이름으로 쫓겨나는 시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베스트팔렌 평화상을 수상한다는 소식과 스페인의 마리 카르멘 씨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집을 잃었다는 뉴스는, 오늘날 세상이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개의 단면이다. 하나는 힘에 기반한 위태로운 질서를 ‘평화’라 명명하고, 다른 하나는 긍휼이 배제된 차가운 절차를 ‘정의’라 부른다. 이처럼 가치가 전도된 혼란 속에서, 유럽 전역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더 강하게 함께’ 모여 ‘유럽을 위한 희망’을 노래하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다시금 모색하고 있다. 이는 무너진 성벽 앞에서 시대적 책임을 통감하는 영적 몸부림이다.
세상이 내세우는 평화는 종종 칼날 위에 서 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 동맹에게 돌아가는 역설은 세상의 평화가 ‘전쟁의 부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함을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정의는 법 조항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마리 카르멘 씨의 퇴거는 모든 법적 요건을 충족했을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존엄과 70년의 삶의 무게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미슈파트’(정의)와 ‘체다카’(공의)와는 거리가 멀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정함은, 오히려 그 법이 지키고자 했던 공동체의 근간을 허무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세상의 법과 질서 앞에서 교회는 더 높은 차원의 법, 즉 하나님 나라의 법을 증거할 사명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굶주림에 빵을 훔치고, 도망 중에 성당의 은식기마저 훔친 장발장을 마주한다. 세상의 법을 대변하는 경찰 앞에서 주교는 장발장을 고발하는 대신, “내가 준 것인데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나머지 은촛대마저 그의 손에 쥐여준다. 그는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 즉 용서와 사랑의 법으로 죄인을 대한다. “나는 이 은으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샀소”라고 말하는 주교의 모습은, ‘이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 수 있는가’를 묻는 세상의 질문을 압도하며 ‘그곳에 살아야 할 사람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책임을 지는가’를 묻는 교회의 응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예화다.
독일복음주의연합이 천명했듯, 교회는 ‘사회에 참여하되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인’ 자세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것을 넘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을 ‘놀랍게 지음 받은’ 존재로 끌어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재정적 제자도를 실천하며, 연약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혼란의 시대는 영적 갈급함을 증폭시키며, 이는 복음을 위한 전례 없는 기회가 된다. 교회가 세상의 법과 힘의 논리를 초월하는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로 바로 설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참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세상의 법과 힘을 추종하는가, 아니면 긍휼이 이기는 심판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서 있는가. 그 답은 우리의 삶의 예배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세상이 내세우는 평화는 종종 칼날 위에 서 있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 동맹에게 돌아가는 역설은 세상의 평화가 ‘전쟁의 부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함을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정의는 법 조항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마리 카르멘 씨의 퇴거는 모든 법적 요건을 충족했을지 모르나, 그 과정에서 한 인간의 존엄과 70년의 삶의 무게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미슈파트’(정의)와 ‘체다카’(공의)와는 거리가 멀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정함은, 오히려 그 법이 지키고자 했던 공동체의 근간을 허무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세상의 법과 질서 앞에서 교회는 더 높은 차원의 법, 즉 하나님 나라의 법을 증거할 사명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굶주림에 빵을 훔치고, 도망 중에 성당의 은식기마저 훔친 장발장을 마주한다. 세상의 법을 대변하는 경찰 앞에서 주교는 장발장을 고발하는 대신, “내가 준 것인데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소?”라며 나머지 은촛대마저 그의 손에 쥐여준다. 그는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 즉 용서와 사랑의 법으로 죄인을 대한다. “나는 이 은으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샀소”라고 말하는 주교의 모습은, ‘이 부동산으로 얼마를 벌 수 있는가’를 묻는 세상의 질문을 압도하며 ‘그곳에 살아야 할 사람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책임을 지는가’를 묻는 교회의 응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예화다.
독일복음주의연합이 천명했듯, 교회는 ‘사회에 참여하되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인’ 자세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살아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것을 넘어,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을 ‘놀랍게 지음 받은’ 존재로 끌어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재정적 제자도를 실천하며, 연약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혼란의 시대는 영적 갈급함을 증폭시키며, 이는 복음을 위한 전례 없는 기회가 된다. 교회가 세상의 법과 힘의 논리를 초월하는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로 바로 설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참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세상의 법과 힘을 추종하는가, 아니면 긍휼이 이기는 심판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서 있는가. 그 답은 우리의 삶의 예배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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