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 선언을 넘어, 비가시적 왕국을 증거하라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14 08:30
본문
우리의 눈은 가시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한 주를 목도했다. 한편에서는 태양과 달이 빚어내는 개기일식의 장엄한 우주적 경이와, 광복의 역사를 기념하며 미래 비전을 선포하는 한국교회의 웅장한 목소리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콜롬비아의 땅을 흔든 지진의 참혹한 파괴와 알제리에서 신앙을 위해 지하로 숨어든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교차했다. 세상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영광과 비극의 파노라마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실재를 통찰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공기를 매일 2만 번씩 들이마시면서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공기가 없다면 모든 생명은 소멸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바로 이와 같다. 정밀한 시계처럼 운행하는 천체의 움직임 속에서, 그리고 암흑 같던 일제 강점기 시절 복음의 씨앗 하나가 민족을 변화시킨 역사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손길과 주권을 발견한다. 이 비가시적 실재야말로 모든 가시적 현상의 근원이자 본질이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는 이 진리를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18세기 대영제국의 번영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와 눈물이라는 가시적 현실 위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단지 재산 목록에 오르는 ‘화물’로 여겼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그들의 검은 피부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 그는 모든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비가시적 진리를 붙들었다. 그의 20년에 걸친 외로운 투쟁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신념을 ‘노예무역 폐지’라는 영국의 법전 위에 새겨진 가시적 현실로 바꾸어 놓은 거룩한 분투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발표한 비전 선언문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다짐은 그 자체로 귀하다. 그러나 이 선언이 윌버포스의 신념처럼 비가시적 진리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위험이 있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가시적 구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의 재건 노력에 대한 제언처럼, 그들의 무너진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알제리의 지하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닫힌 예배당이라는 가시적 박해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위로와 교통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우리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믿음은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어 비가시적 실재를 현재의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영적 능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고대 서사시를 통해 인간의 죄책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고뇌를 탐구하듯, 세상 역시 보이지 않는 영적 갈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가시적인 건물과 조직, 선언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과 화해의 노력이, 세상이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시적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비가시적 진리 위에 굳건히 설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받은 이유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현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실재를 통찰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인 공기를 매일 2만 번씩 들이마시면서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공기가 없다면 모든 생명은 소멸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바로 이와 같다. 정밀한 시계처럼 운행하는 천체의 움직임 속에서, 그리고 암흑 같던 일제 강점기 시절 복음의 씨앗 하나가 민족을 변화시킨 역사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손길과 주권을 발견한다. 이 비가시적 실재야말로 모든 가시적 현상의 근원이자 본질이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는 이 진리를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18세기 대영제국의 번영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와 눈물이라는 가시적 현실 위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단지 재산 목록에 오르는 ‘화물’로 여겼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그들의 검은 피부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 그는 모든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비가시적 진리를 붙들었다. 그의 20년에 걸친 외로운 투쟁은, 보이지 않는 영적 신념을 ‘노예무역 폐지’라는 영국의 법전 위에 새겨진 가시적 현실로 바꾸어 놓은 거룩한 분투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발표한 비전 선언문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다짐은 그 자체로 귀하다. 그러나 이 선언이 윌버포스의 신념처럼 비가시적 진리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 위험이 있다.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가시적 구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의 재건 노력에 대한 제언처럼, 그들의 무너진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알제리의 지하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닫힌 예배당이라는 가시적 박해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령의 위로와 교통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우리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믿음은 가시적 세계의 한계를 넘어 비가시적 실재를 현재의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영적 능력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고대 서사시를 통해 인간의 죄책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존적 고뇌를 탐구하듯, 세상 역시 보이지 않는 영적 갈증으로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가시적인 건물과 조직, 선언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과 화해의 노력이, 세상이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시적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비가시적 진리 위에 굳건히 설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름받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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