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를 호흡하듯, 사랑을 실천하라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12 08:30
본문
인간은 하루 약 2만 번 숨을 쉬지만, 그 공기의 소중함을 매 순간 인지하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절대적 필수 요소인 공기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사명 역시 우리 신앙의 호흡과 같다. 한국교회연합이 광복과 건국의 역사적 기념일을 맞아 발표한 비전 선언문은 바로 이 영적 호흡을 가다듬는 행위와 같다.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화해와 일치를 다짐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선언은 교회가 마땅히 들이마셔야 할 시대적 사명의 공기이다.
그러나 들이마신 숨은 반드시 내쉬어야 생명이 순환하는 법이다. 선언이 선언으로 그칠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오늘의 지면은 선언을 넘어선 ‘행동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스페인 세우타의 교회들은 밀려드는 이주민의 물결 앞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즉각적인 구호와 돌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콜롬비아를 강타한 지진의 폐허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너진 잔해 속에서 생명을 구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실질적인 위로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들이마신 사명의 공기를 세상 속으로 내쉬는 생명의 활동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한 인물을 통해 그 위대한 실천을 증언한다. 19세기, 하와이 몰로카이섬은 나병 환자들의 살아있는 무덤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동정했으나 멀리서 기도하고 구호품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는 달랐다. 그는 ‘그들을 위한’ 사역이 아닌 ‘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역을 택했다. 직접 상처를 싸매고, 함께 예배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마침내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그 섬에 뼈를 묻었다. 그의 삶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나 선언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는 ‘성육신적 실천’임을 웅변했다.
사도 야고보의 권면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심장을 찌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그는 단호하게 지적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4-17). 한국 교회가 발표한 비전 선언문이 ‘평안히 가라, 배부르게 하라’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
자녀보다 반려동물이 더 많은 시대, 재난 속에서 생존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 증오범죄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켜야 할 책임 등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한국 교회가 선포한 거룩한 비전은 이제 교회의 문턱을 넘어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흘러가야 한다. 다미안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세우타와 콜롬비아의 이름 없는 교회들이 그러하듯,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들이마신 은혜의 공기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숨결로 내쉴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선언을 넘어 실천으로, 호흡하듯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들이마신 숨은 반드시 내쉬어야 생명이 순환하는 법이다. 선언이 선언으로 그칠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오늘의 지면은 선언을 넘어선 ‘행동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스페인 세우타의 교회들은 밀려드는 이주민의 물결 앞에서 대책을 논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즉각적인 구호와 돌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콜롬비아를 강타한 지진의 폐허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무너진 잔해 속에서 생명을 구하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실질적인 위로를 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들이마신 사명의 공기를 세상 속으로 내쉬는 생명의 활동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한 인물을 통해 그 위대한 실천을 증언한다. 19세기, 하와이 몰로카이섬은 나병 환자들의 살아있는 무덤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동정했으나 멀리서 기도하고 구호품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는 달랐다. 그는 ‘그들을 위한’ 사역이 아닌 ‘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사역을 택했다. 직접 상처를 싸매고, 함께 예배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마침내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그 섬에 뼈를 묻었다. 그의 삶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나 선언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는 ‘성육신적 실천’임을 웅변했다.
사도 야고보의 권면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심장을 찌른다. 행함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그는 단호하게 지적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4-17). 한국 교회가 발표한 비전 선언문이 ‘평안히 가라, 배부르게 하라’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
자녀보다 반려동물이 더 많은 시대, 재난 속에서 생존을 넘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 증오범죄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켜야 할 책임 등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한국 교회가 선포한 거룩한 비전은 이제 교회의 문턱을 넘어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흘러가야 한다. 다미안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세우타와 콜롬비아의 이름 없는 교회들이 그러하듯,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 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들이마신 은혜의 공기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숨결로 내쉴 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것이다. 선언을 넘어 실천으로, 호흡하듯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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