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균열이 댐을 무너뜨린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09 08:30
본문
영국 법정에서는 아동의 성(性)을 유보하는 실험이 허가되고, 유럽의 가정에서는 아이 울음소리 대신 반려동물의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진다. 대서양 건너 미국 정치판에서는 어제의 비판이 오늘의 아첨으로 돌변하며 양심의 가치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신성한 교회의 문턱까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우상이 그 효용성을 앞세워 넘보고 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이 사건들은 개별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저변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흐름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와 창조 질서라는 견고한 댐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한 '사소한 타협'이라는 이름의 물줄기이다.
오늘날 세상은 편의와 효율, 그리고 개인의 주관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마저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그 경계선을 허물어뜨린다. 정치인이 신념을 버리고 권력에 무릎 꿇는 것은 개인의 영달이라는 편의를 위해 양심을 타협한 결과이다. 가정이 자녀 양육의 수고로움 대신 반려동물과의 안락함을 택하는 현상 역시, 창조의 섭리보다 개인의 정서적 만족을 우선시하는 세태의 단면이다. 미성년자에게 사춘기 차단제를 투여하는 임상시험의 허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진리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타협이다. 교회마저 목회자의 영적 고뇌와 성도의 인격적 교제라는 본질을 효율적인 AI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직면한 것은, 이 거대한 흐름이 어디까지 밀려왔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20세기 기독교 지성의 거인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조언하는 장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스크루테이프는 큰 죄악으로 단번에 넘어뜨리려는 시도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점진적인 길, 발밑이 부드럽고 급작스러운 전환이나 이정표도 없는 완만한 경사길'이다. 인간은 이 길 위에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사소한 타협과 무감각 속에 서서히 진리에서 멀어져 결국 파국의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의 풍경은 마치 스크루테이프의 전략이 성공적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무대와 같다.
이 모든 현상의 영적 뿌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통찰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성경은 인간의 근원적 죄악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25). 진리이신 하나님 대신 거짓된 자기 욕망을, 창조주 대신 정치 권력과 기술, 안락함과 같은 피조물을 경배할 때,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은 타협은 결국 경배의 대상을 바꾸는 배교의 시작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여 복음의 경계선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진리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시대의 요구라는 미명 아래 진리의 말씀을 타협하거나, 효율성을 핑계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거대한 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다. 한국 교회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스며드는 이 사소한 균열들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와 창조 질서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굳건히 서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어둠이 짙을수록 등불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오늘날 세상은 편의와 효율, 그리고 개인의 주관적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마저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그 경계선을 허물어뜨린다. 정치인이 신념을 버리고 권력에 무릎 꿇는 것은 개인의 영달이라는 편의를 위해 양심을 타협한 결과이다. 가정이 자녀 양육의 수고로움 대신 반려동물과의 안락함을 택하는 현상 역시, 창조의 섭리보다 개인의 정서적 만족을 우선시하는 세태의 단면이다. 미성년자에게 사춘기 차단제를 투여하는 임상시험의 허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진리보다 우위에 두고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타협이다. 교회마저 목회자의 영적 고뇌와 성도의 인격적 교제라는 본질을 효율적인 AI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직면한 것은, 이 거대한 흐름이 어디까지 밀려왔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20세기 기독교 지성의 거인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노련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조언하는 장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스크루테이프는 큰 죄악으로 단번에 넘어뜨리려는 시도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점진적인 길, 발밑이 부드럽고 급작스러운 전환이나 이정표도 없는 완만한 경사길'이다. 인간은 이 길 위에서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사소한 타협과 무감각 속에 서서히 진리에서 멀어져 결국 파국의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의 풍경은 마치 스크루테이프의 전략이 성공적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무대와 같다.
이 모든 현상의 영적 뿌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통찰한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성경은 인간의 근원적 죄악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25). 진리이신 하나님 대신 거짓된 자기 욕망을, 창조주 대신 정치 권력과 기술, 안락함과 같은 피조물을 경배할 때, 세상의 모든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은 타협은 결국 경배의 대상을 바꾸는 배교의 시작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여 복음의 경계선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진리의 깃발을 세우는 것이다. 시대의 요구라는 미명 아래 진리의 말씀을 타협하거나, 효율성을 핑계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거대한 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균열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다. 한국 교회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스며드는 이 사소한 균열들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와 창조 질서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굳건히 서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어둠이 짙을수록 등불의 가치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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