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가: 세상 속 교회의 정체성을 묻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07 08:30
본문
오늘의 소식들은 거대한 전환기 앞에 선 세계의 복잡한 단면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한 국가의 대사가 기도로 임기를 시작하고, 유서 깊은 교권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내부를 단속하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던 선교사는 이국의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편에서는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실험이 법의 이름으로 승인되고,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교회에 희망과 위협의 두 얼굴을 동시에 내민다. 이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는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의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불거진 갈등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마주한 영적 현실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스스로를 '보편적(Catholic)'이라 칭하는 교회가 '로마적(Roman)'인, 즉 제도적 이익과 권력 유지에 함몰될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하늘의 소명을 땅의 왕국과 맞바꾸고, 말씀의 권위를 조직의 권력으로 대체하며, 좁은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문화적 타협과 자기 보존이라는 넓은 길을 택하려는 교회의 오랜 유혹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우화를 통해 이 영적 위기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세비야의 감옥에서 재림한 그리스도를 마주한 늙은 대심문관은 경배가 아닌 질책을 쏟아낸다. 그는 교회가 인간에게서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의 짐을 빼앗고, 그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정'했다고 강변한다. 인류를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다고 믿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바로 그 '지혜롭고 두려운 영', 즉 세상 권세의 영과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섬기기보다 군림하려 하는 궁극적인 '로마의 길'이다.
그러나 오늘의 소식 속에는 분명 다른 길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테네에서 난민들을 섬기다 생을 마감한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걸어간 길이다. 그의 증언은 웅장한 대성당이나 교황의 칙서가 아닌, 소외된 이들을 향한 이름 없는 사랑과 희생 속에 있었다. 그의 삶과 비극적 죽음은 그 어떤 교권의 선포보다 복음의 능력을 깊이 있게 증거한다. 또한 140년간 제국 건설이 아닌 교제와 영적 갱신, 사회적 책임을 위해 모여온 독일 복음주의 연합의 발자취 속에 그 길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보편성이다. 지상의 한 중심에 세워진 권력이 아니라, 세상 모든 구석에서 흩어져 신실하게 복음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통해 드러나는 보편성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보전되기를 간구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5-16). 이것이 바로 교회가 걸어야 할 외날의 길이다. 세상의 정치와 기술, 아픔의 한복판에 존재하되, 세상의 권력욕과 창조주를 향한 반역에 물들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자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진리를 희생해서라도 세상의 영향력과 안정, 제도적 안위를 추구하는 대심문관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외면과 순교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섬김과 희생, 그리고 흔들림 없는 증인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인공지능과 젠더 이데올로기, 지정학적 위기가 몰아치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소명은 또 다른 '로마'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은 오직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요, 자신의 영광이 아닌 사랑을 위해 모든 권세를 버리신 분의 영광을 비추는 산 위의 등불이 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불거진 갈등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마주한 영적 현실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스스로를 '보편적(Catholic)'이라 칭하는 교회가 '로마적(Roman)'인, 즉 제도적 이익과 권력 유지에 함몰될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하늘의 소명을 땅의 왕국과 맞바꾸고, 말씀의 권위를 조직의 권력으로 대체하며, 좁은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문화적 타협과 자기 보존이라는 넓은 길을 택하려는 교회의 오랜 유혹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우화를 통해 이 영적 위기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세비야의 감옥에서 재림한 그리스도를 마주한 늙은 대심문관은 경배가 아닌 질책을 쏟아낸다. 그는 교회가 인간에게서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의 짐을 빼앗고, 그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정'했다고 강변한다. 인류를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한다고 믿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바로 그 '지혜롭고 두려운 영', 즉 세상 권세의 영과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원하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섬기기보다 군림하려 하는 궁극적인 '로마의 길'이다.
그러나 오늘의 소식 속에는 분명 다른 길이 존재한다. 그것은 아테네에서 난민들을 섬기다 생을 마감한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걸어간 길이다. 그의 증언은 웅장한 대성당이나 교황의 칙서가 아닌, 소외된 이들을 향한 이름 없는 사랑과 희생 속에 있었다. 그의 삶과 비극적 죽음은 그 어떤 교권의 선포보다 복음의 능력을 깊이 있게 증거한다. 또한 140년간 제국 건설이 아닌 교제와 영적 갱신, 사회적 책임을 위해 모여온 독일 복음주의 연합의 발자취 속에 그 길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보편성이다. 지상의 한 중심에 세워진 권력이 아니라, 세상 모든 구석에서 흩어져 신실하게 복음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통해 드러나는 보편성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보전되기를 간구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7:15-16). 이것이 바로 교회가 걸어야 할 외날의 길이다. 세상의 정치와 기술, 아픔의 한복판에 존재하되, 세상의 권력욕과 창조주를 향한 반역에 물들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자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진리를 희생해서라도 세상의 영향력과 안정, 제도적 안위를 추구하는 대심문관의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외면과 순교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섬김과 희생, 그리고 흔들림 없는 증인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인공지능과 젠더 이데올로기, 지정학적 위기가 몰아치는 시대 속에서 우리의 소명은 또 다른 '로마'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은 오직 어두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요, 자신의 영광이 아닌 사랑을 위해 모든 권세를 버리신 분의 영광을 비추는 산 위의 등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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