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향한 부르심, 세상의 빛으로 서는 길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06 08:30
본문
오늘의 소식들은 동시대 교회와 그 교회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복잡한 자화상을 그려낸다. 한인 기독교인이 주한미국대사라는 중책을 맡고, 세계적인 축구 감독의 삶을 지탱한 신앙이 조명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보편적 진리를 잠식하는 교권의 제도적 이기심과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적 유혹, 그리고 전 세계를 휩쓰는 고독의 전염병에 대한 경고음도 들려온다. 이처럼 파편화된 현실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현기증 나는 변화와 깊은 공허의 시대 속에서, 우리의 참된 소명과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을 상실할 유혹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린다.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보편적(Catholic)’ 가치보다 ‘로마(Roman)’의 제도적 이익이 앞서는 듯한 최근의 파문 논란은 우리에게 보내는 서늘한 경고다. 교회의 생존과 권위 유지가 최우선 목표가 될 때, 교회가 섬겨야 할 복음의 순수성은 필연적으로 훼손된다. 이는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미묘한 위험과도 맞닿아 있다. 기술은 전례 없는 효율성을 약속하지만,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사역의 본질을 망각한 채 기술적 해결책만을 좇는다면 교회의 심장은 공허해질 것이다. 교회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기업이 아니라, 사랑으로 엮인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아프지만 선명한 교훈을 남겼다.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에 순응하며 악마적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부속품으로 전락하던 시절, 본회퍼와 고백교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제자도’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교회의 정체성이 세속적 영향력이나 제도적 권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순종에 있음을 알았다. 본회퍼가 외친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의 투쟁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영혼을 건 생사의 싸움이었다. 그는 교회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파괴된 세상 속에서 핍박과 순교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일복음주의연합이 140년간 이어온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러한 거짓에 대한 저항의 불길 속에서 벼려진 신앙의 유산이다.
이러한 진정한 현존의 요청은 미셸 스틸 대사나 위르겐 클롭 감독과 같은 인물들의 삶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울림을 발견하게 한다. 신앙에 의해 빚어진 그들의 공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증언이 예배당의 벽을 넘어 외교와 스포츠의 현장에서도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삶의 근간에는 깊은 감사가 자리하며, 이는 ‘물’에 대한 묵상에서 아름답게 드러난다. 액체 상태의 물이 우주적으로 경이로운 희소성을 지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무감각한 일상의 관성이 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근원적 선물에 대한 경이와 감사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영적 질병을 치유하고 현대 사회를 잠식하는 고립감에 맞설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더 복잡한 길이 아니라, 더 깊은 단순함의 길이다. 그것은 연결에 목마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함께 있어 주는’ 길이다. 로잔 운동이 제언하듯, ‘느린 현존’을 실천하고 ‘깊은 관계를 인내로이 함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또 하나의 효율적인 프로그램이나 세련된 시스템을 제공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과 정직, 그리고 은혜의 공동체 속에 체화된 그리스도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도록 부름받았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전했던 권면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립보서 2:15).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본질을 상실할 유혹은 언제나 우리 곁에 도사린다.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보편적(Catholic)’ 가치보다 ‘로마(Roman)’의 제도적 이익이 앞서는 듯한 최근의 파문 논란은 우리에게 보내는 서늘한 경고다. 교회의 생존과 권위 유지가 최우선 목표가 될 때, 교회가 섬겨야 할 복음의 순수성은 필연적으로 훼손된다. 이는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미묘한 위험과도 맞닿아 있다. 기술은 전례 없는 효율성을 약속하지만,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사역의 본질을 망각한 채 기술적 해결책만을 좇는다면 교회의 심장은 공허해질 것이다. 교회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기업이 아니라, 사랑으로 엮인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아프지만 선명한 교훈을 남겼다.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에 순응하며 악마적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부속품으로 전락하던 시절, 본회퍼와 고백교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제자도’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교회의 정체성이 세속적 영향력이나 제도적 권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순종에 있음을 알았다. 본회퍼가 외친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의 투쟁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영혼을 건 생사의 싸움이었다. 그는 교회가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파괴된 세상 속에서 핍박과 순교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독일복음주의연합이 140년간 이어온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러한 거짓에 대한 저항의 불길 속에서 벼려진 신앙의 유산이다.
이러한 진정한 현존의 요청은 미셸 스틸 대사나 위르겐 클롭 감독과 같은 인물들의 삶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울림을 발견하게 한다. 신앙에 의해 빚어진 그들의 공적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증언이 예배당의 벽을 넘어 외교와 스포츠의 현장에서도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삶의 근간에는 깊은 감사가 자리하며, 이는 ‘물’에 대한 묵상에서 아름답게 드러난다. 액체 상태의 물이 우주적으로 경이로운 희소성을 지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무감각한 일상의 관성이 되어버릴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근원적 선물에 대한 경이와 감사의 회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영적 질병을 치유하고 현대 사회를 잠식하는 고립감에 맞설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더 복잡한 길이 아니라, 더 깊은 단순함의 길이다. 그것은 연결에 목마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함께 있어 주는’ 길이다. 로잔 운동이 제언하듯, ‘느린 현존’을 실천하고 ‘깊은 관계를 인내로이 함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또 하나의 효율적인 프로그램이나 세련된 시스템을 제공하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과 정직, 그리고 은혜의 공동체 속에 체화된 그리스도 자신을 세상에 내어주도록 부름받았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우리의 사명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전했던 권면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립보서 2:15).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기사 공유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