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의 시장에 선 교회, 길을 묻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7-30 08:30
본문
오늘의 지면을 채운 소식들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파편적인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모자이크의 조각들처럼, 시대의 영적 기류와 교회의 좌표를 드러내는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성(性)과 생명의 가치를 두고 벌어지는 대한민국의 광장 집회,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증오 선동가’로 낙인찍힌 핀란드 의원의 법정 투쟁, 기독교 단체를 ‘반인권’으로 규정했다가 철회한 국제앰네스티의 해프닝은 모두 하나의 현상을 가리킨다. 세상의 가치 체계와 교회의 신앙고백 사이의 간극이 더 이상 위태로운 평화로 봉합될 수 없는, 충돌의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명백한 징후다.
존 버니언의 역작 『천로역정』에서 순례자 ‘크리스천’과 ‘믿음’이 당도한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은 이 시대를 비추는 서늘한 거울이다. 그 시장은 온갖 종류의 쾌락과 재물, 명예가 거래되는 곳이지만, 순례자들이 그곳에서 핍박받은 이유는 무언가를 샀거나 팔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가 달랐고, 무엇보다 그들이 하늘의 가치, 즉 ‘진리’만을 사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품에 무관심하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이 순례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조롱하고 박해했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는 목소리는 ‘혐오’로 매도되고, 생명을 존중하자는 외침은 ‘자유의 억압’으로 치부되며, 거룩을 향한 열망은 ‘시대착오적 광신’으로 희화화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시장은 교회를 향해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하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반인권’의 낙인을 찍겠다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허영의 시장이 가진 본질적 공허함 또한 직시해야 한다. 현대 사회가 복잡한 현실을 영웅과 악당의 개인 서사로 축소하며 ‘군주’를 갈망하는 현상, 그리고 전 세계 6명 중 1명이 겪는다는 외로움의 팬데믹은 시장의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깊은 영적 갈증을 드러낸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그 결과는 우상화된 개인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독한 절규뿐이다. 시장은 결코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수 없으며,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는 외로움이라는 실존적 고통에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사명이 명확해진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허영의 시장 한복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즉 진리를 위해 기꺼이 낯선 자와 이방인이 되기를 각오하는 예언자적 자세다. 핀란드의 페이비 래새넌 의원처럼, 때로는 세상의 법정이 우리를 유죄로 판결할지라도 우리는 더 높은 하늘의 법정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두 번째 사명은 세상의 공허함을 채울 유일한 대안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외로움으로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라는 참된 소속감을 제공하고, 헛된 군주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해서는 이룰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덮친 거대한 산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보존된 기독교 캠프센터의 소식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세속주의의 불길이 아무리 거세게 타오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교회를 그분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지키고 보호하신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며, 우리의 승리는 세상의 힘이나 논리에 있지 않다. 교회는 허영의 시장이 제공하는 거짓된 안정과 번영을 탐하지 말고,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굳건히 서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소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바로 이 믿음으로 오늘의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존 버니언의 역작 『천로역정』에서 순례자 ‘크리스천’과 ‘믿음’이 당도한 ‘허영의 시장(Vanity Fair)’은 이 시대를 비추는 서늘한 거울이다. 그 시장은 온갖 종류의 쾌락과 재물, 명예가 거래되는 곳이지만, 순례자들이 그곳에서 핍박받은 이유는 무언가를 샀거나 팔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가 달랐고, 무엇보다 그들이 하늘의 가치, 즉 ‘진리’만을 사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품에 무관심하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는 이 순례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며 조롱하고 박해했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 성경적 진리를 고수하는 목소리는 ‘혐오’로 매도되고, 생명을 존중하자는 외침은 ‘자유의 억압’으로 치부되며, 거룩을 향한 열망은 ‘시대착오적 광신’으로 희화화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시장은 교회를 향해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하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반인권’의 낙인을 찍겠다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허영의 시장이 가진 본질적 공허함 또한 직시해야 한다. 현대 사회가 복잡한 현실을 영웅과 악당의 개인 서사로 축소하며 ‘군주’를 갈망하는 현상, 그리고 전 세계 6명 중 1명이 겪는다는 외로움의 팬데믹은 시장의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깊은 영적 갈증을 드러낸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그 결과는 우상화된 개인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독한 절규뿐이다. 시장은 결코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수 없으며,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는 외로움이라는 실존적 고통에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사명이 명확해진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허영의 시장 한복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즉 진리를 위해 기꺼이 낯선 자와 이방인이 되기를 각오하는 예언자적 자세다. 핀란드의 페이비 래새넌 의원처럼, 때로는 세상의 법정이 우리를 유죄로 판결할지라도 우리는 더 높은 하늘의 법정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두 번째 사명은 세상의 공허함을 채울 유일한 대안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외로움으로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라는 참된 소속감을 제공하고, 헛된 군주를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한다. 이는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해서는 이룰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페인 마드리드를 덮친 거대한 산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보존된 기독교 캠프센터의 소식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세속주의의 불길이 아무리 거세게 타오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교회를 그분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지키고 보호하신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며, 우리의 승리는 세상의 힘이나 논리에 있지 않다. 교회는 허영의 시장이 제공하는 거짓된 안정과 번영을 탐하지 말고,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굳건히 서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소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바로 이 믿음으로 오늘의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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