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교회의 자리를 묻다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7-12 08:30
본문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세계의 소식들은 마치 깨진 거울 조각처럼 흩어져 있으나, 그 조각들은 한결같이 신음하는 시대의 자화상을 비춘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신앙의 이름으로 대중의 신망을 얻었던 정치 지도자가 추악한 성범죄의 가해자로 전락하여 공동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유럽 대륙에서는 전쟁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은 이들을 향한 빗장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으며, 연약한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마저 위협받고 있다. 스페인의 대지는 거대한 불길에 삼켜져 잿더미로 변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 갔다. 한편, 기술의 진보는 인류를 고립된 섬으로 내몰아, 대화와 교감 대신 차가운 스크린 앞에서 침묵하는 ‘음소거 세대’를 낳고 있다.
이 모든 비극과 혼돈의 파편들은 단지 사회적 현상이나 정치적 난제를 넘어, 피조세계 전체가 겪는 깊은 고통의 외침과 같다. 지도자의 타락은 인간 내면의 죄성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를 폭로하며, 난민을 향한 냉대는 이기심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의 현대적 재현이다. 예측 불가능한 재앙은 피조물의 탄식을, 기술이 야기한 소외는 진정한 관계에 대한 인간 영혼의 갈증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콜롬비아의 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교육 수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한 줄기 빛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에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교회는 이 무너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가?
역사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했던 순간들을 증언한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그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에서 기록했듯이, 2세기 중반과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을 휩쓴 두 차례의 끔찍한 역병은 기독교의 본질을 세상에 드러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Galen)가 기록할 만큼 치명적이었던 전염병이 창궐하자, 이교도들은 병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도시를 떠나기 바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적인 유대와 윤리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도시에 남아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교도 이웃까지 간호하며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그들의 자기희생적 사랑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었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썩지 않을 소망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교회의 진정한 힘은 세속적 권력이나 화려한 웅변이 아닌,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지키는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발현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도전 역시 다르지 않다. 성범죄 피해자의 찢긴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 낯선 이방인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디지털의 소음 속에서 진솔한 대면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다. 이는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제자도의 실천이다. 성경은 이 땅의 현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2-25)
세상의 탄식 속에서 교회는 함께 탄식하며,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참음으로 기다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우리의 자리는 고통받는 피조물의 바로 곁이며, 우리의 언어는 희생적 사랑의 행위이다. 잿더미와 같은 세상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무너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교회가 있어야 할 유일한 자리이다.
이 모든 비극과 혼돈의 파편들은 단지 사회적 현상이나 정치적 난제를 넘어, 피조세계 전체가 겪는 깊은 고통의 외침과 같다. 지도자의 타락은 인간 내면의 죄성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지를 폭로하며, 난민을 향한 냉대는 이기심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의 현대적 재현이다. 예측 불가능한 재앙은 피조물의 탄식을, 기술이 야기한 소외는 진정한 관계에 대한 인간 영혼의 갈증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콜롬비아의 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교육 수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한 줄기 빛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에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교회는 이 무너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가?
역사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했던 순간들을 증언한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그의 저서 『기독교의 발흥』에서 기록했듯이, 2세기 중반과 3세기 중반 로마 제국을 휩쓴 두 차례의 끔찍한 역병은 기독교의 본질을 세상에 드러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Galen)가 기록할 만큼 치명적이었던 전염병이 창궐하자, 이교도들은 병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도시를 떠나기 바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적인 유대와 윤리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도시에 남아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교도 이웃까지 간호하며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그들의 자기희생적 사랑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었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썩지 않을 소망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교회의 진정한 힘은 세속적 권력이나 화려한 웅변이 아닌,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지키는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발현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도전 역시 다르지 않다. 성범죄 피해자의 찢긴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편에 서는 것, 낯선 이방인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디지털의 소음 속에서 진솔한 대면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다. 이는 세상의 방식을 거슬러,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제자도의 실천이다. 성경은 이 땅의 현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2-25)
세상의 탄식 속에서 교회는 함께 탄식하며,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참음으로 기다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우리의 자리는 고통받는 피조물의 바로 곁이며, 우리의 언어는 희생적 사랑의 행위이다. 잿더미와 같은 세상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무너진 세상의 한복판에서 교회가 있어야 할 유일한 자리이다.
기사 공유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