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거스르는 믿음, 아타나시우스의 길을 따르라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15 08:30
본문
한때 기독교 문명의 심장이었던 서유럽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깊은 영적 침체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교회를 향한 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수 세기 동안 신앙의 보루였던 스페인에서는 실천적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이 소수로 전락했다. 언론은 세속적 가치관의 확성기가 되어 교회의 목소리를 왜곡하거나 변두리로 밀어낸다. 이는 단순히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세속화의 파도가 우리 발밑까지 차오르고 있음을 알리는 준엄한 경고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교회는 안팎으로 도전을 맞고 있다. 밖으로는 진리를 조롱하는 세상의 풍조와 맞서 싸워야 하며, 안으로는 신비주의적 체험과 성경적 진리를 분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여 안락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고독과 핍박을 감수하고서라도 진리의 파수꾼으로 설 것인가. 역사는 이러한 갈림길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온 인물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4세기, 교회는 아리우스주의라는 거대한 이단 사설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는 이 사상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권력이었던 로마 황제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교회의 대다수를 집어삼켰다. 모두가 오류에 동조하며 진리가 암흑 속에 갇히려 할 때, 단 한 사람이 외로운 횃불을 들고 일어섰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콘트라 문둠(Athanasius contra mundum)’, 즉 ‘세상을 거스르는 아타나시우스’라는 말이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정도로, 온 세상이 등을 돌릴지라도 홀로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를 붙들었다. 다섯 번의 유배와 수십 년에 걸친 고난 속에서도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불굴의 신앙은 결국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내는 반석이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이다. 세상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넓은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걸어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선택하는 용기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남기며 이 길을 권면했다. 그의 고백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에게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완주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마지막 주자 찰스 올멘처럼, 우리의 경주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더디고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완주 그 자체다. 한국 교회는 이제 세상의 인정을 구하는 것을 멈추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아타나시우스처럼 진리를 위해 고독을 자처하고,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묵묵히 마쳐야 한다. 승리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믿음을 지키는 선한 싸움을 싸울 뿐이다. 그 마지막 날,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친히 우리의 싸움을 인정하시고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실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교회는 안팎으로 도전을 맞고 있다. 밖으로는 진리를 조롱하는 세상의 풍조와 맞서 싸워야 하며, 안으로는 신비주의적 체험과 성경적 진리를 분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여 안락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고독과 핍박을 감수하고서라도 진리의 파수꾼으로 설 것인가. 역사는 이러한 갈림길에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온 인물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4세기, 교회는 아리우스주의라는 거대한 이단 사설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는 이 사상은 당대 최고의 지성과 권력이었던 로마 황제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교회의 대다수를 집어삼켰다. 모두가 오류에 동조하며 진리가 암흑 속에 갇히려 할 때, 단 한 사람이 외로운 횃불을 들고 일어섰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콘트라 문둠(Athanasius contra mundum)’, 즉 ‘세상을 거스르는 아타나시우스’라는 말이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정도로, 온 세상이 등을 돌릴지라도 홀로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를 붙들었다. 다섯 번의 유배와 수십 년에 걸친 고난 속에서도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불굴의 신앙은 결국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내는 반석이 되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이다. 세상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넓은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걸어가신 좁고 협착한 길을 선택하는 용기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편지를 남기며 이 길을 권면했다. 그의 고백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에게 신앙의 경주를 어떻게 완주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마지막 주자 찰스 올멘처럼, 우리의 경주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더디고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완주 그 자체다. 한국 교회는 이제 세상의 인정을 구하는 것을 멈추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아타나시우스처럼 진리를 위해 고독을 자처하고, 바울처럼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묵묵히 마쳐야 한다. 승리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믿음을 지키는 선한 싸움을 싸울 뿐이다. 그 마지막 날,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친히 우리의 싸움을 인정하시고 영원한 승리를 선포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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