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파도 앞에 선 유럽 교회, 다시 복음의 닻을 내릴 때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14 08:30
본문
최근 스페인에서 펼쳐진 종교적 풍경은 유럽 교회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 폭의 상징적인 그림과 같다. 한편에서는 교황의 방문을 ‘성소수자 축제’에 버금가는 열기로 대서특필하며 세속적 가치와 어깨를 나란히 세우는 언론의 장관이 연출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한때 90%에 육박했던 가톨릭 신자 비율이 55%로 추락하고 그중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18%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텅 빈 대성당의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화려한 의식과 군중의 환호라는 외피 아래, 신앙의 심장은 멈추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종교 사회학적 변화를 넘어, 서구 문명의 기둥뿌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비보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의 변질에 있다. 교황의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가 죄의 비극성을 간과하고 인간의 본성을 은총으로 완성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을 펼쳐 보일 때, 우리는 교회가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입맛에 맞는 조미료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복음주의 집회의 순수성은 외면한 채 교황의 행차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이상 세속의 양심을 찌르지 않기 때문이다. 죄와 심판, 회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의 날 선 검을 무디게 하고, ‘보편적 인류애’라는 달콤한 솜사탕을 쥐여줄 때, 세상은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모습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이단들을 화형시키던 바로 그 광장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오신다. 그러나 교회의 최고 권력자인 대심문관은 그를 즉시 감옥에 가두고 밤늦게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는가? … 우리는 당신의 위업을 교정했소.”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주신 ‘자유’가 인간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에, 교회는 그 자유를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군중을 교회가 책임지고 이끌겠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가장 교만하고 사탄적인 인본주의의 극치다. 오늘날 유럽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 속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지만 정작 그분의 통치와 주권, 그리고 피 묻은 십자가의 진리는 사라진 채, 인간의 위대함과 가능성을 찬미하는 대심문관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은 착각일 뿐인가.
복음의 능력이 사라진 자리는 영적 공백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폭력과 증오를 쏟아낸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참혹한 폭력과 서유럽 전역에서 증가하는 기독교 혐오 범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회가 진리의 등불을 스스로 꺼버린 어둠 속에서 온갖 악의 영들이 활개 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한국 교회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해답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교회의 생명력은 거대한 행사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세상과의 타협에서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초라해 보이고, 세상으로부터 조롱받을지라도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때 교회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절실한 시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세속의 거친 파도가 유럽 교회를 삼키려 하는 오늘,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이라는 굳건한 닻을 깊이 내리고 시대의 풍랑을 헤쳐 나갈 채비를 마쳐야 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의 변질에 있다. 교황의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가 죄의 비극성을 간과하고 인간의 본성을 은총으로 완성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을 펼쳐 보일 때, 우리는 교회가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입맛에 맞는 조미료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복음주의 집회의 순수성은 외면한 채 교황의 행차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 이상 세속의 양심을 찌르지 않기 때문이다. 죄와 심판, 회개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의 날 선 검을 무디게 하고, ‘보편적 인류애’라는 달콤한 솜사탕을 쥐여줄 때, 세상은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모습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 이단들을 화형시키던 바로 그 광장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오신다. 그러나 교회의 최고 권력자인 대심문관은 그를 즉시 감옥에 가두고 밤늦게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는가? … 우리는 당신의 위업을 교정했소.”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주신 ‘자유’가 인간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에, 교회는 그 자유를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항변한다. 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군중을 교회가 책임지고 이끌겠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가장 교만하고 사탄적인 인본주의의 극치다. 오늘날 유럽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 속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지만 정작 그분의 통치와 주권, 그리고 피 묻은 십자가의 진리는 사라진 채, 인간의 위대함과 가능성을 찬미하는 대심문관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것은 착각일 뿐인가.
복음의 능력이 사라진 자리는 영적 공백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폭력과 증오를 쏟아낸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참혹한 폭력과 서유럽 전역에서 증가하는 기독교 혐오 범죄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회가 진리의 등불을 스스로 꺼버린 어둠 속에서 온갖 악의 영들이 활개 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한국 교회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해답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교회의 생명력은 거대한 행사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세상과의 타협에서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초라해 보이고, 세상으로부터 조롱받을지라도 변치 않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때 교회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절실한 시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세속의 거친 파도가 유럽 교회를 삼키려 하는 오늘,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복음이라는 굳건한 닻을 깊이 내리고 시대의 풍랑을 헤쳐 나갈 채비를 마쳐야 할 것이다.
기사 공유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