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제단 앞에 선 교회, 인본주의의 안개를 걷고 복음을 외치라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13 08:30
본문
북아일랜드의 거리에서는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스페인의 광장에서는 화려한 종교적 행사가 펼쳐진다. 한쪽에서는 인간의 야만적인 본성이 가림 없이 분출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열망이 장엄한 예식으로 포장된다. 이 극명한 대비는 역설적으로 동시대가 앓고 있는 깊은 영적 질병의 동일한 증상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과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 곧 인본주의라는 이름의 거대한 신기루다.
최근 교황 레오 14세의 회칙 ‘Magnifica Humanitas’가 신학적 비판에 직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해당 회칙의 기저에 깔린 ‘자연-은총 상호의존’ 사상은 죄의 비극성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온전히 직시하지 못하고, 복음을 타락한 본성을 ‘완성’시키는 도구로 격하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이는 은총이 없이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인간의 절망적 실존을 외면한 채, 인간의 가능성을 과신하는 세련된 인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신학적 토양 위에서는 벨파스트의 폭력과 같은 죄의 끔찍한 열매들을 단지 교양이 부족하거나 사회 시스템이 미비한 탓으로 돌릴 뿐, 그 뿌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임을 보지 못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에 서늘한 통찰을 던진다. 대심문관은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모두 이기신 그리스도를 향해,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자유’를 주었다고 비난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보다 빵을, 신앙보다 기적과 권위를 원한다고 단언하며, 교회는 그리스도가 거부한 바로 그 방식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출발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대체하려는 교만과 불신이다. 이는 오늘날 세속 언론이 교황의 방문과 같은 종교적 스펙터클에는 열광하면서도,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복음주의의 메시지는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현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세상은 대심문관이 제공하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원할 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참된 자유에는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무엇을 붙들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벨파스트의 증오와 스페인의 종교적 열광, 그리고 로마의 신학적 인본주의를 꿰뚫는 단 하나의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인간의 가능성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교회는 이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지금은 그 어떤 형태의 인본주의적 안개도 걷어내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다. 무너진 세상의 제단 앞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인간이 만든 화려한 바벨탑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구원의 방주로 들어오라고 외쳐야 한다. 교회가 이 복음의 능력을 다시 붙들 때, 비로소 우리는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 참된 화해를 이루는 치유자가 될 것이며,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이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최근 교황 레오 14세의 회칙 ‘Magnifica Humanitas’가 신학적 비판에 직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해당 회칙의 기저에 깔린 ‘자연-은총 상호의존’ 사상은 죄의 비극성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온전히 직시하지 못하고, 복음을 타락한 본성을 ‘완성’시키는 도구로 격하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이는 은총이 없이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인간의 절망적 실존을 외면한 채, 인간의 가능성을 과신하는 세련된 인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신학적 토양 위에서는 벨파스트의 폭력과 같은 죄의 끔찍한 열매들을 단지 교양이 부족하거나 사회 시스템이 미비한 탓으로 돌릴 뿐, 그 뿌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임을 보지 못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에 서늘한 통찰을 던진다. 대심문관은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모두 이기신 그리스도를 향해, 인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자유’를 주었다고 비난한다. 그는 인간이 자유보다 빵을, 신앙보다 기적과 권위를 원한다고 단언하며, 교회는 그리스도가 거부한 바로 그 방식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출발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질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대체하려는 교만과 불신이다. 이는 오늘날 세속 언론이 교황의 방문과 같은 종교적 스펙터클에는 열광하면서도,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복음주의의 메시지는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현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세상은 대심문관이 제공하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원할 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참된 자유에는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무엇을 붙들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벨파스트의 증오와 스페인의 종교적 열광, 그리고 로마의 신학적 인본주의를 꿰뚫는 단 하나의 진리를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인간의 가능성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교회는 이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지금은 그 어떤 형태의 인본주의적 안개도 걷어내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을 선명하게 드러낼 때다. 무너진 세상의 제단 앞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인간이 만든 화려한 바벨탑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구원의 방주로 들어오라고 외쳐야 한다. 교회가 이 복음의 능력을 다시 붙들 때, 비로소 우리는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 참된 화해를 이루는 치유자가 될 것이며, 세상의 조롱과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이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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