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교회가 들어야 할 유일한 깃발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12 08:30
본문
북아일랜드의 밤거리를 뒤덮은 증오의 불길과 스페인 의사당을 가득 메운 환호의 박수 소리가 교차하는 시대의 풍경은 혼란 그 자체다. 한쪽에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인종과 민족을 향한 야만적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세속 권력의 심장부에서 종교 지도자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며 도덕적 지침을 구한다. 이 극명한 대조는 길 잃은 세상이 얼마나 간절하게 구원과 해답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갈망이 얼마나 위태로운 길로 향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통렬한 역설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에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오시지만, 그는 백성의 환호를 뒤로하고 늙은 대심문관에게 체포된다. 대심문관은 감옥의 그리스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인류에게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해 당신이 주려 했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었다고.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기에, 교회가 그들의 양심을 지배하고 빵을 분배하며 지상 낙원을 이룩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계획으로 ‘수정’하고 대체하려는 가장 교만하고 위험한 인본주의의 초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대심문관의 그림자를 도처에서 목격한다. 교황의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가 죄의 비극성을 간과하고 자연과 은총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가능성을 찬미할 때, 그리고 세상의 의회가 그 인본주의적 메시지에 열광할 때, 우리는 복음이 인간을 높이는 도구로 전락하는 위험을 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형태의 세속 철학일 뿐이다. 신학적 타협과 세속화를 이유로 캔터베리와 결별을 선언한 스페인 성공회 공동체의 고뇌는, 바로 이 변질된 복음 앞에서 진리를 수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러한 외부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부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지도자들의 도덕적 실패는 양무리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세상의 부패를 답습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복음주의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채 세상의 거대한 행사들 속에서 길을 잃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것은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한 영합도,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외적 성장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선포하는 원초적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는 대심문관처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기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를 선포하는 나팔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심장부에서 담대히 외쳤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유일한 깃발이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복음만이 이 혼돈의 시대를 이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에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찾아오시지만, 그는 백성의 환호를 뒤로하고 늙은 대심문관에게 체포된다. 대심문관은 감옥의 그리스도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인류에게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해 당신이 주려 했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거두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었다고.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기에, 교회가 그들의 양심을 지배하고 빵을 분배하며 지상 낙원을 이룩하겠노라고 선언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계획으로 ‘수정’하고 대체하려는 가장 교만하고 위험한 인본주의의 초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대심문관의 그림자를 도처에서 목격한다. 교황의 회칙 ‘위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가 죄의 비극성을 간과하고 자연과 은총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가능성을 찬미할 때, 그리고 세상의 의회가 그 인본주의적 메시지에 열광할 때, 우리는 복음이 인간을 높이는 도구로 전락하는 위험을 본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확인시켜주는 또 다른 형태의 세속 철학일 뿐이다. 신학적 타협과 세속화를 이유로 캔터베리와 결별을 선언한 스페인 성공회 공동체의 고뇌는, 바로 이 변질된 복음 앞에서 진리를 수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러한 외부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부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지도자들의 도덕적 실패는 양무리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세상의 부패를 답습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복음주의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채 세상의 거대한 행사들 속에서 길을 잃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 교회에 요구되는 것은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한 영합도,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외적 성장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비참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선포하는 원초적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는 대심문관처럼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기관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일한 진리를 선포하는 나팔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심장부에서 담대히 외쳤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이 말씀이 오늘 우리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유일한 깃발이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복음만이 이 혼돈의 시대를 이기고 영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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