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도시, 하나의 소망: 무너지는 바벨탑 앞에서 교회가 걸어야 할 길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05 23:51
본문
시대의 흐름은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과 같아서, 때로는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상충된 선율들이 동시에 울려 퍼진다. 한편에서는 인공지능 시대의 ‘위대한 인본주의’를 선언하는 교황의 회칙이 발표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이 무너져 역대 최고의 낙태 건수를 기록하는 스코틀랜드의 비극이 전해진다. 이 극명한 대조는 단순한 사회 현상의 나열이 아니라, 인류가 쌓아 올리고 있는 두 개의 상이한 도시, 두 개의 다른 길을 명확히 보여주는 영적 지표이다.
로마 가톨릭이 제시하는 ‘인간 존엄성’의 담론은, 그 언어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인간을 세우려는 인본주의의 그림자를 감추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부여받는 절대적 가치이다. 이 근원을 망각한 채 인간의 이성과 노력으로 존엄의 탑을 쌓으려는 시도는 결국 창세기의 바벨탑과 다르지 않다. 그 필연적 귀결은 스코틀랜드의 통계가 보여주듯, 가장 연약한 생명을 인간의 편의와 선택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자기 파멸적인 모순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 할 때, 역설적으로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4세기 말,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말발굽 아래 스러져 갈 때,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불후의 명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을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두 도시의 투쟁을 설파했다. 그는 “두 종류의 사랑이 두 개의 도시를 만들었다. 즉, 하느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기 사랑(amor sui)이 지상의 도시를 만들었고, 자기를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하느님 사랑(amor Dei)이 하늘의 도시를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지상의 도시는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하늘의 도시는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찾는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뉴스들은 바로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다.
세상이 바벨탑 건설에 몰두하는 동안, 하나님의 도시는 연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이들을 통해 묵묵히 세워지고 있다. 인구 15만의 작은 나라 퀴라소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 무대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모습, 러시아의 미사일로 폐허가 된 교회 터에서 파괴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하는 우크라이나 목회자의 고백, 급진 세력의 26차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독일 교회의 결단 속에 하늘 도시의 견고함이 드러난다. 이들은 세상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는 자들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한국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낸 이 땅 위에서 어느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사역 자체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스페인 목회자의 경고처럼,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지상의 영광을 쫓다가 하늘의 본향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며, 나그네와 순례자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때다. 세상의 무너지는 가치관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자 사명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로마 가톨릭이 제시하는 ‘인간 존엄성’의 담론은, 그 언어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에 인간을 세우려는 인본주의의 그림자를 감추지 못한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부여받는 절대적 가치이다. 이 근원을 망각한 채 인간의 이성과 노력으로 존엄의 탑을 쌓으려는 시도는 결국 창세기의 바벨탑과 다르지 않다. 그 필연적 귀결은 스코틀랜드의 통계가 보여주듯, 가장 연약한 생명을 인간의 편의와 선택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자기 파멸적인 모순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려 할 때, 역설적으로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4세기 말, 영원할 것 같던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말발굽 아래 스러져 갈 때,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불후의 명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을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두 도시의 투쟁을 설파했다. 그는 “두 종류의 사랑이 두 개의 도시를 만들었다. 즉, 하느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자기 사랑(amor sui)이 지상의 도시를 만들었고, 자기를 경멸하는 데까지 이른 하느님 사랑(amor Dei)이 하늘의 도시를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지상의 도시는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하늘의 도시는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찾는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뉴스들은 바로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고 있다.
세상이 바벨탑 건설에 몰두하는 동안, 하나님의 도시는 연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이들을 통해 묵묵히 세워지고 있다. 인구 15만의 작은 나라 퀴라소 축구팀이 월드컵 본선 무대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모습, 러시아의 미사일로 폐허가 된 교회 터에서 파괴가 아닌 ‘하나님의 긍휼’을 발견하는 우크라이나 목회자의 고백, 급진 세력의 26차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독일 교회의 결단 속에 하늘 도시의 견고함이 드러난다. 이들은 세상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는 자들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한국 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낸 이 땅 위에서 어느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사역 자체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스페인 목회자의 경고처럼,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지상의 영광을 쫓다가 하늘의 본향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며, 나그네와 순례자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때다. 세상의 무너지는 가치관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자 사명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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