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황무지에서 피어나는 겨자씨, 교회의 사명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8-28 08:30
본문
우크라이나의 포성, 아이티의 비명, 벨라루스의 신음이 지구촌을 뒤덮고, 대한민국 광장에서는 거룩한 가치를 지키려는 외침이 울려 퍼진다. 세상은 마치 방향 잃은 배처럼 거친 풍랑에 휩쓸리고 있으며,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혼돈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인공지능이 신앙의 영역까지 넘보지만, 인간 영혼의 깊은 갈증과 공허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이 시대의 혼돈 속에서 교회는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싸움은 다층적이다. 서울 여의도에 모인 5만 성도의 외침은 단순히 몇몇 법안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허물려는 거대한 ‘성혁명 태풍’에 맞선 영적 전투의 선포였다. 이 싸움의 뿌리는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2,600년 전 우상의 틀과 맞닿아 있다. 시대와 모양은 달라도, 창조주를 등지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과 우상숭배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고발당한 벨라루스 목회자의 현실은, 이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실제적인지를 웅변한다.
혼돈이 깊어질수록 세상은 손쉬운 위안과 거짓된 안식처를 찾는다.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은 현대판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 욕망의 단면을 보여준다. 신앙의 고뇌와 기도의 씨름, 말씀 묵상의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즉각적인 답을 제공하는 AI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해치는 위험한 유혹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어리석음과 같다. 영혼 없는 알고리즘이 계산해 낸 ‘그럴듯한’ 텍스트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대체할 수 없다.
역사는 교회가 가장 어두운 시절에 가장 밝은 빛을 발했음을 증언한다. 12세기부터 수백 년간 알프스 산맥의 척박한 피에몬테 계곡에 숨어 살아야 했던 발도파(Waldensians) 성도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동굴과 토굴을 전전하면서도 손으로 성경을 필사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세상 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복음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숭고한 예배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묵묵히 이웃을 섬기는 우크라이나 교회, 무장 괴한의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아이티의 성도들은 바로 이 발도파의 신실한 후예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망하거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스위스 니젠 산 정상에 올라 지역의 부흥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한 목회자들의 연합은 교회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보여준다. 교회는 세상의 죄악을 향해 ‘거룩한 방파제’를 세우고, 동시에 메마른 영혼들을 향해서는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샘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유럽 대륙을 덮친 가뭄이 역설적으로 물의 소중함을 일깨웠듯, 이 시대의 영적 가뭄은 교회가 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인지를 증명하는 기회이다.
세상은 황무지와 같고 교회는 그곳에 심긴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비록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늘에 닿는 거목으로 자라나 만민이 쉴 그늘을 제공할 생명이 담겨 있다. 온갖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교회의 기초는 인간의 지혜나 힘이 아닌,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와 교회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싸움은 다층적이다. 서울 여의도에 모인 5만 성도의 외침은 단순히 몇몇 법안에 대한 정치적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허물려는 거대한 ‘성혁명 태풍’에 맞선 영적 전투의 선포였다. 이 싸움의 뿌리는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2,600년 전 우상의 틀과 맞닿아 있다. 시대와 모양은 달라도, 창조주를 등지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의 교만과 우상숭배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고발당한 벨라루스 목회자의 현실은, 이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하고 실제적인지를 웅변한다.
혼돈이 깊어질수록 세상은 손쉬운 위안과 거짓된 안식처를 찾는다.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은 현대판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 욕망의 단면을 보여준다. 신앙의 고뇌와 기도의 씨름, 말씀 묵상의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즉각적인 답을 제공하는 AI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해치는 위험한 유혹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던 어리석음과 같다. 영혼 없는 알고리즘이 계산해 낸 ‘그럴듯한’ 텍스트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대체할 수 없다.
역사는 교회가 가장 어두운 시절에 가장 밝은 빛을 발했음을 증언한다. 12세기부터 수백 년간 알프스 산맥의 척박한 피에몬테 계곡에 숨어 살아야 했던 발도파(Waldensians) 성도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 동굴과 토굴을 전전하면서도 손으로 성경을 필사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세상 권력에 대한 저항이자,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복음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숭고한 예배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묵묵히 이웃을 섬기는 우크라이나 교회, 무장 괴한의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아이티의 성도들은 바로 이 발도파의 신실한 후예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망하거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스위스 니젠 산 정상에 올라 지역의 부흥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한 목회자들의 연합은 교회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보여준다. 교회는 세상의 죄악을 향해 ‘거룩한 방파제’를 세우고, 동시에 메마른 영혼들을 향해서는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샘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유럽 대륙을 덮친 가뭄이 역설적으로 물의 소중함을 일깨웠듯, 이 시대의 영적 가뭄은 교회가 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인지를 증명하는 기회이다.
세상은 황무지와 같고 교회는 그곳에 심긴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비록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늘에 닿는 거목으로 자라나 만민이 쉴 그늘을 제공할 생명이 담겨 있다. 온갖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교회의 기초는 인간의 지혜나 힘이 아닌,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와 교회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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