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성벽을 넘어, 시대의 광장으로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6-24 08:30
본문
오늘의 지면은 마치 격랑이 몰아치는 현대사의 한복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인공지능(AI)이라는 미증유의 기술이 인간의 존엄성을 묻는 유럽 의회의 고뇌에서부터, 알바니아 거리의 부패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함성, 그리고 미국 야구장에서 벌어진 성경적 가치와 세속 이념의 팽팽한 대치까지, 세상은 한순간도 쉼 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6.25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며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려는 한국 교회의 다짐은 이러한 시대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서 있는 좌표를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의 파고 앞에서 교회는 종종 안온한 기억의 성벽 안으로 물러서려는 유혹을 받는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고, 우리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몸짓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단 한 번도 성벽 안에 갇혀 안주하라고 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라 명령한다. 암스테르담 여름 학교가 지적한 복음주의자들의 '사각지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세상의 변화에 눈감고 지역 교회의 울타리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시대의 광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사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선배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18세기 영국, 젊고 유능한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깊은 회심을 경험한 후, 더러운 정치판을 떠나 목회자가 되어 고요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그의 영적 멘토였던 존 뉴턴(John Newton)은 단호히 만류했다. 노예선의 선장에서 회심한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자리에 세우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의회라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야말로 그가 섬겨야 할 ‘교구(parish)’임을 일깨웠다. 그날 이후 윌버포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소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라는 거대한 악과 싸우는 데 바쳤다. 그는 기도실에만 머물지 않았고, 자신의 신앙을 의회 연설과 법안 발의, 끈질긴 설득과 토론이라는 공적 언어로 번역해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바로 윌버포스의 의회와 같다. 우리는 인공지능 윤리라는 새로운 시대의 법안을 두고 신학적, 성경적 가치를 증언해야 하며, 사회의 부정부패와 불의에 맞서 투명성과 정의를 외쳐야 한다. 때로는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서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변치 않는 진리를 선포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세상과의 싸움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책무이다. 동시에 우리는 내부를 돌아보며, 신앙의 여정에서 상처 입고 지친 이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강인한 외적 싸움은 온전한 내적 회복과 함께 갈 때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명의 동력은 세상의 승자들을 좇는 인간적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그분과의 친밀한 동행에서 비롯된다. 윌버포스가 수십 년의 좌절과 반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매일 새벽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했던 시간에서 나왔다. 교회가 시대의 광장으로 담대히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골방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참된 승자와 소통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명확하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기억의 성벽을 넘어, 이제 한국 교회는 정의와 사랑, 그리고 겸손한 동행의 깃발을 들고 시대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오늘의 교구요, 사명의 현장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의 파고 앞에서 교회는 종종 안온한 기억의 성벽 안으로 물러서려는 유혹을 받는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고, 우리만의 언어로 소통하며,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몸짓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단 한 번도 성벽 안에 갇혀 안주하라고 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부패를 막고 어둠을 밝히라 명령한다. 암스테르담 여름 학교가 지적한 복음주의자들의 '사각지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세상의 변화에 눈감고 지역 교회의 울타리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시대의 광장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사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선배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18세기 영국, 젊고 유능한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깊은 회심을 경험한 후, 더러운 정치판을 떠나 목회자가 되어 고요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꿈꿨다. 그러나 그의 영적 멘토였던 존 뉴턴(John Newton)은 단호히 만류했다. 노예선의 선장에서 회심한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자리에 세우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의회라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야말로 그가 섬겨야 할 ‘교구(parish)’임을 일깨웠다. 그날 이후 윌버포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소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라는 거대한 악과 싸우는 데 바쳤다. 그는 기도실에만 머물지 않았고, 자신의 신앙을 의회 연설과 법안 발의, 끈질긴 설득과 토론이라는 공적 언어로 번역해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바로 윌버포스의 의회와 같다. 우리는 인공지능 윤리라는 새로운 시대의 법안을 두고 신학적, 성경적 가치를 증언해야 하며, 사회의 부정부패와 불의에 맞서 투명성과 정의를 외쳐야 한다. 때로는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서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변치 않는 진리를 선포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세상과의 싸움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책무이다. 동시에 우리는 내부를 돌아보며, 신앙의 여정에서 상처 입고 지친 이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강인한 외적 싸움은 온전한 내적 회복과 함께 갈 때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명의 동력은 세상의 승자들을 좇는 인간적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직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그분과의 친밀한 동행에서 비롯된다. 윌버포스가 수십 년의 좌절과 반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매일 새벽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교제했던 시간에서 나왔다. 교회가 시대의 광장으로 담대히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골방에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참된 승자와 소통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명확하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기억의 성벽을 넘어, 이제 한국 교회는 정의와 사랑, 그리고 겸손한 동행의 깃발을 들고 시대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오늘의 교구요, 사명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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