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소수, 세상의 빛으로 서는 법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9-16 08:30
본문
서구 교회의 쇠퇴라는 익숙한 서사 속에서, 영국으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작지만 의미 있는 파장을 일으킨다. 실천하는 영국 개신교인의 3분의 2가 복음주의 신학을 지지하며, 그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다는 연구 결과는 세속화의 거센 파도 앞에서 신앙의 본질을 붙들려는 이들의 견고한 뿌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숫자의 반등이나 세력의 과시가 아니다. 오히려 꺼져가는 듯 보이는 시대의 등불 속에서,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불씨를 발견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발견은 축배를 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이 ‘견고한 소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의 그늘 아래 사회적 부패가 만연하고 노예무역이라는 거대한 죄악이 인류의 양심을 더럽히던 시절, ‘클래펌 파(Clapham Sect)’라 불리는 복음주의 기독교인 그룹이 있었다. 윌리엄 윌버포스, 해나 모어 등 소수의 의원, 은행가, 작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결코 다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타는 신앙과 치열한 사회적 책임감을 결합하여 시대의 어둠에 맞섰다.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헌신은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라는 기적적인 열매를 맺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도덕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힘은 수적 우위가 아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이웃을 향한 희생적 사랑에서 나왔다.
클래펌 파의 유산은 오늘날 교회가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비춘다. 첫째, 교회는 안으로 더욱 깊어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을 단순한 동정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잠재력을 지닌 동역자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하다. 교회가 세상의 편견을 답습하여 연약한 지체를 소외시킨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을 향한 빛이 될 수 없다. 교회의 강함은 가장 약한 지체를 어떻게 품고 세우느냐에 달려있다.
둘째, 교회는 밖으로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정치적 양극화와 분노, 허위 정보가 넘실대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권력 쟁취나 특정 이념의 관철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분열된 세상 속에서 화해의 다리를 놓고,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세상의 방식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잃어버린 가치를 증언하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이 모든 사명의 근거는 주님의 말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영국 교회의 소식은 한국 교회에 보내는 작지만 분명한 신호다. 이제는 숫자의 감소나 사회적 영향력의 축소를 한탄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작지만 맛을 내는 소금으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굳건히 설 때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수에 달려있지 않다. 오직 말씀 위에 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는 ‘견고한 소수’가 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 발견은 축배를 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이 ‘견고한 소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영국, 산업혁명의 그늘 아래 사회적 부패가 만연하고 노예무역이라는 거대한 죄악이 인류의 양심을 더럽히던 시절, ‘클래펌 파(Clapham Sect)’라 불리는 복음주의 기독교인 그룹이 있었다. 윌리엄 윌버포스, 해나 모어 등 소수의 의원, 은행가, 작가들로 구성된 이들은 결코 다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타는 신앙과 치열한 사회적 책임감을 결합하여 시대의 어둠에 맞섰다. 수십 년에 걸친 그들의 헌신은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라는 기적적인 열매를 맺었고, 영국 사회 전반에 도덕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힘은 수적 우위가 아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이웃을 향한 희생적 사랑에서 나왔다.
클래펌 파의 유산은 오늘날 교회가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비춘다. 첫째, 교회는 안으로 더욱 깊어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을 단순한 동정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잠재력을 지닌 동역자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시급하다. 교회가 세상의 편견을 답습하여 연약한 지체를 소외시킨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을 향한 빛이 될 수 없다. 교회의 강함은 가장 약한 지체를 어떻게 품고 세우느냐에 달려있다.
둘째, 교회는 밖으로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정치적 양극화와 분노, 허위 정보가 넘실대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권력 쟁취나 특정 이념의 관철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분열된 세상 속에서 화해의 다리를 놓고,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세상의 방식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잃어버린 가치를 증언하는 공동체로 서야 한다.
이 모든 사명의 근거는 주님의 말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영국 교회의 소식은 한국 교회에 보내는 작지만 분명한 신호다. 이제는 숫자의 감소나 사회적 영향력의 축소를 한탄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작지만 맛을 내는 소금으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굳건히 설 때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수에 달려있지 않다. 오직 말씀 위에 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는 ‘견고한 소수’가 되는 것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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