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우는 손과 견디는 믿음, 감사의 두 얼굴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6-07-21 08:30
본문
지구 한편에서는 생명을 세우는 소리가,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를 허무는 신음이 동시에 들려온다.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세켈레카'에서는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물고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자라나고 있다. '일어나라'는 이름처럼, 그곳은 소외된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창조의 동산이다. 그러나 중동 이란에서는 15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성 베드로 복음주의 교회가 강제 폐쇄의 위협 앞에 스러져가고 있다. 신앙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성도들의 눈물은 박해받는 교회의 현실을 아프게 증언한다.
세움과 무너짐, 환희와 탄식. 이 극단적인 두 풍경은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이 간극 속에서 교회는 어떤 영적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해답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의 신학에 있다. 감사는 단순히 좋은 일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자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을 잃고도 왼손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사격선수 카롤리 타카치의 이야기는, 감사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 승리의 동력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성도에게 있어 감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나치 정권의 광기 아래 신음하던 독일, 그 암흑의 시대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통렬히 비판하며 '값비싼 은혜'에 응답하는 제자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는 불의한 정권에 맞서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세우는 손'을 가졌으며, 동시에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옥중서신을 통해 소망과 감사를 노래하는 '견디는 믿음'을 지녔다. 본회퍼에게 감사는 안락한 서재의 사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드리는 예배였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붙들었던 실존적 신앙이었다. 모잠비크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손길과, 이란에서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눈물로 버티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본회퍼가 보여준 감사의 두 얼굴과 맞닿아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교회를 세우는 기쁨을 누렸지만, 동시에 차디찬 감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가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신앙의 비결을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보냈다. 그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무게로 다가온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모잠비크의 아이들을 위해 함께 기뻐하며 세우는 일에 동참하고, 이란의 형제들을 위해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감사가 단지 나의 안녕과 축복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값싼 감사'에 불과하다. 세우는 손과 견디는 믿음, 이 둘을 모두 품는 '값비싼 감사'를 회복할 때, 한국 교회는 비로소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세계 교회와 함께 울고 웃는 그리스도의 몸 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세움과 무너짐, 환희와 탄식. 이 극단적인 두 풍경은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이 간극 속에서 교회는 어떤 영적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 해답은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의 신학에 있다. 감사는 단순히 좋은 일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자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른손을 잃고도 왼손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사격선수 카롤리 타카치의 이야기는, 감사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 승리의 동력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성도에게 있어 감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나치 정권의 광기 아래 신음하던 독일, 그 암흑의 시대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통렬히 비판하며 '값비싼 은혜'에 응답하는 제자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는 불의한 정권에 맞서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세우는 손'을 가졌으며, 동시에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옥중서신을 통해 소망과 감사를 노래하는 '견디는 믿음'을 지녔다. 본회퍼에게 감사는 안락한 서재의 사변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감방 바닥에서 드리는 예배였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붙들었던 실존적 신앙이었다. 모잠비크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손길과, 이란에서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눈물로 버티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본회퍼가 보여준 감사의 두 얼굴과 맞닿아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교회를 세우는 기쁨을 누렸지만, 동시에 차디찬 감옥에 갇혀 순교를 기다리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가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신앙의 비결을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보냈다. 그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무게로 다가온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모잠비크의 아이들을 위해 함께 기뻐하며 세우는 일에 동참하고, 이란의 형제들을 위해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감사가 단지 나의 안녕과 축복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값싼 감사'에 불과하다. 세우는 손과 견디는 믿음, 이 둘을 모두 품는 '값비싼 감사'를 회복할 때, 한국 교회는 비로소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세계 교회와 함께 울고 웃는 그리스도의 몸 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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