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경 목사 인물기획 ① 부르심의 뿌리 > 목회 > 세계복음뉴스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목회

HOME  >  교계뉴스  >  목회

#토지노【tosino.tv】 #해외 축구 무료 중계 추천 #하이토토 #vip 토토 먹튀 #토토 1 1 #메이저 토토 사이트 텐벳 【TOSINO.TV】 뽕 티비 월드컵 #무료 해외 중계 사이트

김도경 목사 인물기획 ① 부르심의 뿌리
특전사에서 목회자가 되기까지

마라나타 기자
작성일 2025-08-09 01:18

본문

용산 한국여성신학교 아래 작은 다방. 곰다방이라는 이름처럼 투박하게 튀어나온 건물에서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일주일,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못한 채 야위어진 모습이었다. 그때 한 여성이 그를 보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저 사람이구나.”

그 여성은 훗날 김도경 목사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첫 만남에서 한 달 보름 만에 결혼한 이 부부의 사랑 이야기 뒤에는 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우리 어머니의 단 하나 기도 제목은 아들이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산후풍과 관절염을 앓던 어머니

1970년대 어느 골목길. 전도팀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시절이었다. 산후풍과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김 목사의 어머니에게 한 담임목사가 찾아왔다.

몸이 아프시니까 꼭 교회 다니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몸도 치유 받을 수 있고 아들도 잘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감동 받은 어머니는 몸이 불편한데도 매일 아들의 손을 잡고 교회로 향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김도경 청년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고 했지만, 김 목사에게는 부모를 모시는경험이 신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훗날 그는 고백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어머니 모시고 다니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된 거죠.”

66 경호실, 8명만 살아남다

청와대 경호실 산하 66군 경호실. 각 여단에서 A급 인재 60여 명이 모여 교육받았지만, 최종 선발된 것은 단 8명뿐이었다. 김 목사는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차지철 경호실장 직속 요원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하사 계급이었지만 그 백파워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대단했죠.”

하지만 그곳에서의 신앙생활은 아주 처절했다.” 특전사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적 전쟁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고 권면했듯이, 김 목사는 실제 군인으로서 영적 군사로서의 이중 훈련을 받았다. 매월 낙하산 강하훈련을 해야 했고, 면도칼로 손날으 긁어도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몸을 만들어야 했다.

팀워크가 기가 막히거든요. 1개 팀이 12명 입니다. 선배를 하늘같이 섬기고 후배들을 키워주는 거기에 제가 굉장히 매력을 많이 느꼈죠.”

7b983563c4940ad080a1bfa6650e8c88_1754669904_589.jpg
허리 부상과 후송, 그리고 시련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낙하산 강하 중 허리를 다치고 기흉(氣胸)까지 생긴 김 목사는 결국 후송되었다. 이후 치유가 되었지만 66경호실에서는 더 이상 받아주지 않았다.

특전사령부로 재배속되었지만 그곳은 더욱 혹독했다.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교관으로 있는 곳에서 신병취급받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전출 신청을 한 끝에 27사단으로 이동하여 수색소대장으로 임기를 마쳤다. 1983년 아웅산 사건 발생 한 달 후, 8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기도원에서의 마지막 만남

전역 후 김 목사는 산업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일했다. 위험한 일이지만 군대에서 단련된 체력과 정신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유방암이 폐로 전이된 상황.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김 목사가 알게 된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단계에서였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기도원에 들어갔죠.” 당시 유명한 기도원에서 김 목사는 봉사에 전념했고, 어머니는 기도에 매진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 중에 평안히 소천하셨다.

돌아가신 모습이 편하게 잠든 모습처럼 보였어요. 시신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지...”

그 모습을 본 기도원의 다른 환자들까지 감동받았다. 김 목사는 확신했다. “어머니를 천국으로 하나님이 아무런 고통 없이 그대로 영혼을 모시고 갔구나.”

한 통의 전화, 그리고 운명

어머니 소천 후 7일째, 섬기던 교회의 사모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지금 당장 나오셔야 됩니다. 볼 일이 있다고.” 식음을 전폐한 채 지내던 김 목사를 강제로 불러낸 것은 훗날 아내가 될 여성이었다. 곰다방에서 만난 두 사람. 여성은 첫눈에 그를 보고 확신했다. 결혼 조건은 단 하나였다. “오직 믿음과 소명만 보겠다돈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그녀는 김 목사의 목회자적 소명을 보았다.

우리 집사람이 적극적으로 주선해 가지고... 만나고 나서 한 달 보름 만에 바로 결혼을 했습니다.”

1988년 결혼 후, 김 목사는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995년 학번으로 신학을 시작한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동권이라 찍혀가지고... 4년 동안을 안수가 연기되었어요

서울에서는 계속 있을 수 없어 부산으로 내려가 개척 사역을 시작했다. 때마침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교회의 담임목사를 다시 만났고, 노회장의 직을 맡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돌이켜보면 김도경 목사의 삶은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 안에 있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시작된 신앙, 특전사에서 단련된 리더십과 팀워크, 66 경호실에서의 엘리트 의식, 후송과 시련을 통한 겸손함, 그리고 어머니의 평안한 소천을 통한 소명 확신까지.

특전사의 강인함과 기독교인의 온유함, 군인의 절제력과 목회자의 사랑이 한 사람 안에서 조화롭게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기도 소명이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제가 전역하자마자 신학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가더라고요.”

어머니의 기도는 아들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 부르심 앞에서 김도경이라는 한 청년은 특전사에서 목사로, 군인에서 목회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음 회에서는 김도경 목사가 서울에서 만난 일진 청소년들과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리고 500만원을 투자한 찬양팀의 기적을 다룬다.-

기사 공유하기
Total 567건 (1 페이지)
목회 목록
기사 목록
게시물 검색
등록된 배너가 없습니다.
N